0621기다려 주시는 예수님(마26:40-43)

목회에서 제자훈련하면서 영혼을 돌보는 것을 목양이라고도 하고 양육이라고도 합니다. 아이를 기를 때 쓰는 말이죠. 양육이라는 말이 목회의 본질, 핵심에 대해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 없이 부어주고 기다려 주고.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고난의 때를 함께 이겨나가길 기다려 주십니다(40절).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 고난을 바로 눈앞에 두고 계십니다. 이 고난은 예수님 당신에게 가장 힘든 것이지만, 또한 제자들에게도 힘든 역경의 시기, 고난의 시기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잡혀가는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모두다 이 시험의 때, 고난의 때에 다 넘어집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함께 깨어 기도하자도, 함께 이겨나가자고 제자들을 격려하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혼자 싸우지 말라고. 지금 우리 삶이 그렇고 이 코로나 사태가 그렇습니다. 혼자는 절대 못 이깁니다. 이 고난의 때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영적이로 깨어 싸워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 어두운 터널을 잘 이겨내시길 예수님께서는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2. 예수님께서는 훈련되지 못하는 제자들을 기다려 주십니다(41절).
예수님께서는 삼년 내내 12제자를 중심으로 함께 거하시면서 함께 전도하시고 함께 치유사역 하시면서 가르치시고 훈련시켜 오셨습니다. 이제는 훈련은 마치고 본격적으로 어둠과 싸워 이겨나가야할 사역의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아직도 이 중요한 시기에 한시간 깨어 기도할 정도로 훈련되지 못합니다. 덜 무장되어 있고, 영적으로도 덜 깨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거나 떠나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떠나간 아들 돌아오길 기다리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의 기둥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역자들로 성장해 가길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가룟유다 외 모든 제자들이 돌아와 사도들과 교회의 기둥들이 되는 걸로 응답받고요. 예수님은 베풀고 기다리는 양육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동일한 기다림을 하고 계십니다. 언제 성장하려나, 언제 영적으로 무장되려나, 언제 제대로 말하고 제대로 행동하려나 우리가 영적으로 훈련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를 기다려 주십니다(4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단순히 예수님의 팔로워, 추종자들만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무 훈련도, 교육도 안된 제자들을 불러서 한없이 사랑을 부어주시고, 감당치 못할 놀라운 가르침과 진리의 말씀으로 먹여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통로와 사역자 되는 것이기에. 그것만이 그들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는 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한 마음 한 뜻을 품기까지 되기를 기다려 주시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시는 것도 그것과 같습니다. 단순히 복 받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떠나가는 자들이 아니라, 복 받고서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의 마음과 비전을 함께 품기를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결론 :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목적 없이 헤매는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려 주시는 위대한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내가 이 고난의 때를 함께 이겨나가길 옆에서 기다려 주시는 분, 아직도 기도도 안하고 말씀도 안읽는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제대로 싸워나가길 기다리시는 분, 거룩한 목적과 삶의 의미를 함께 하기를 기다리는 분, 그분 예수님께서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0614 보람 가득한 인생(막1:29-31)

몇 달이 지나도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지 않으니까, 모든 분들의 삶이 위축되고 암울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움추려 살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인생저무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생길 것같구요. 한평생 살면서 뭔가 가치 있는 일, 뭔가 보람된 일은 남기고 가야할텐데 말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런 비관적인 생각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장모의 보람 가득찬 인생말입니다.

1. 우리의 현실은 무능력, 무의미, 무가치한 상황입니다(30절).
귀한 그리스도이시고 위대한 스승이시며 사위의 주님되시는 예수님께서 집에 방문하셨는데도, 베드로의 장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열병에 누워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이렇게 무능력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이도 먹어 이젠 인생에 특별한 의미나 가치 있는 일들이 일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저 열병에 시달리다 인생 저물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마치 코로나 사태에 잡혀 있는 우리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비즈니스도 할 수 없고, 심방도 할 수 없고, 뭔가 하려고 하면 감염사태가 무섭고, 또 사회적 거리두기 수칙 지켜야 하고. 뭔가 제대로 된 일 할 수가 없는 옴싹달싹을 못하는 무능력의 우리와 유사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부재하시고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는 귀한 사역이 부재한 상태의 우리 모습입니다. 나름 보람을 찾으려 하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이 다 조심스러울 때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인생 자체는 이처럼 허무합니다.

2. 그런 허무한 무가치한 인생에 예수님께서 오시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29절).
열병에 누어서 끙끙 거리고 아무런 소망이 없던 베드로의 장모의 인생 가운데 빛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침 회당 옆에 있어서, 마침 베드로의 장모이기에 온 인류의 희망이시고 존경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서 그녀에게는 희망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부탁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는 겁니다. 치료의 희망도 생기는 겁니다. 우리 인생도 마차가지입니다. 나 혼자서는 내 인생에 별다른 의미나 가치를 두기가 어렵습니다.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오래 살면 뭐합니까? 내 인생이 특별한 의미나 가치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게 찾아오시면 나의 인생은 영광된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주의 창조자께서 내게 오시고, 내 인생에 빛과 생명을 선사하시는데, 내게 영광스러운 순간들을 선사하시는데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예수님 없이, 인생은 너무 가볍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직접 찾아와 주시고, 손을 잡아주시고, 무능력에 빠진 우리 영혼을 일으켜 주십니다.

3. 예수님을 영접한 인생은 가치 있으며 능력이 넘치는 보람있게 됩니다(31절).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니까, 모든 열병, 즉 무능력이 떠나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찾아오신 것만으로 가문의 영광인데, 직접 만져주셔서 그녀의 인생은 빛이 나게 됩니다. 거기다 그 터치로 인해 무능력이 해소되어서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과 의지, 기회가 생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그녀의 인생에 다시올 수 없는 소중한 기회이며 그 결과가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까지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달라진 인생,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은 바로 이처럼 가치 있고 능력이 넘치며 보람이 가득한 인생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녀가 여전히 가난하고 늙고 힘이 없고 아무런 영향력이 없어도, 예수님의 방문과 치유의 선물 하나도 모든 것이 달라진 것처럼요.

결론 : 여러분의 인생은 가치가 있습니까? 보람이 있습니까? 나로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지만, 예수님과 함께라면 내 인생은 저절로 가치가 생기며, 능력이 넘치게 되며 보람이 가득차게 됩니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런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0607고집은 영적 장애물이다(민22:31-34)

나이 먹으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느끼는게, 느는 것은 나이만이 아니더라구요. 살도 늘고, 능청도 늘고, 경험도 늘고. 나이 먹으면서 느는게 다 안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살처럼 멀리해야 하는 것들이 자꾸 느는 것을 봅니다. 바로 고집과 자기 정당화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발람의 경험을 통해서 고집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영혼에게 얼마나 해가 되는지 같이 묵상해 보길 바랍니다.

1. 고집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원하는 것을 완고하게 붙드는 죄입니다(32절).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발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선지자의 직분에 오를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모압왕 발락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을 향해가는 이스라엘민족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몇 번이고 하나님께서 가지말라라고 하시는데, 굳이 또 가도 돼냐고 몇 번을 물어서 아니 하나님께 부탁해서 오늘 본문에서 가는 길입니다. 발락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권력, 부, 댓가를 욕심냈던 것이죠(벧전2:15). 오늘도 발람은 태운 나귀는 좁은 길 한가운데 서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자신과 발람을 위해 피하려하는데, 발람은 돌담에 부딪힌다고 여러번 나귀를 때렸던 겁니다. 심지어는 이런 죽을 뻔한 고비를 경험했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께 또 묻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그 길은 아니다라고 말씀을 여러번 주셨는데, 계속 못 들은척 하고 자기가 가는 길을 허락해 달라는 거죠.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듣고 확인했는데도 여전히 자기 멋대로의 선택을 하는 사람은 완고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죄와 똑같습니다(시78:8).

2. 고집은 하나님의 뜻을 가릴 뿐 아니라 나중에는 보지 못하게 됩니다(33절).
발람처럼 자기 원하는 것을 계속 고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들으려 노력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발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선지자인데, 나귀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설사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지속적으로 들어도 사실 발람처럼 순종도 안하게 됩니다. 자기 마음속에 꽂힌 것이 있어서 그것이 전부처럼 느껴지니까요. 마치 길가밭과 같이 마음이 굳어져서 하나님의 말씀, 은혜를 받고도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처음에 한두번은 알고 고집을 피지만, 그것이 지속되면 그 이후로는 자기도 모르게, 의식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고집을 피며 하나님의 말씀을 완고하게 듣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나중에는 아비가일의 남편이었던 나발처럼 사람 관계에서도 고집스럽고 답답함이 나와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망치기까지 합니다(삼상25:3).

3. 이러한 고집을 빨리 버리지 않으면 축복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수13:2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세상 출세 때문에 고집을 피던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축복에서 밀려납니다. 그저 점술가로서 취급당하고, 결국에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칼날에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명예도 없고, 세상에서의 형통함에서도 제외당하고, 성경에서는 고집스럽고 우둔한 자의 예시가 되는 불명예까지 안게 됩니다. 고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순종도 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 말씀 순종할 때 주어지는 마음의 평안, 삶 가운데 기도 응답, 영혼의 기쁨 등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받아도 누리지 못하고 튕겨냅니다. 길가밭과 같은 상태인 겁니다.

결론 : 여러분은 고집을 부리는 편이십니까? 아니면 부드러운 마음,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일부러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고집을 내려놓고 낮아지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선을 이루는 좋은 길이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머무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0531-자신을 용서했나요? (요 8:9~11)

부활의 승리를 믿는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이나 성령의 역사에 주목하는 것은 정당하고 쉽습니다. 하지만, 이 부활의 승리나 능력은 반드시 한 관문을 거쳐야만 실현이 됩니다. 바로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무슨 과정을 거쳐서 회복되고 선한 능력을 가지는지 같이 묵상해 보겠습니다.

1. 거룩하신 예수님의 정죄의 과정 없이는 우리에겐 기회도 능력도 없습니다(9절).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은 이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그 여인에게는 죄를 회개하고 만회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세상 사람들의 용서 없는 잔인한 모습의 결과입니다. 용서 없이는 회복의 기회도, 생명의 기회도 없습니다. 특별히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사랑보다는 정죄와 분노만이 가득합니다. 그런 정죄함 속에서는 어떤 선한 일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죄를 이길 기회도 안 주지만 죄를 이길 능력도 이런 정죄함에서도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을 빼앗아버리는 정죄함이니까요(5절). 여기에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죄에 대한 회개도 없고, 새로운 방향으로 방향전환을 하는 인생의 변화도 있을 수 없다.

2. 예수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기회와 죄를 이길 능력을 허락하십니다(11절).
현장에서 간음으로 잡혀온 여인은 예수님의 용서를 경험합니다. 이 용서는 그 여인에게는 생명이요,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선을 행할 기회요, 능력이요, 목표입니다. 그러나 이런 용서의 능력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오로지 정당한 권세를 가진 분에 의해서 정죄가 이루어진 다음에 즉 죄가 죄로 정해진 다음에야 용서의 절차가 시작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간음한 여인은 죄에 해당된다는 정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겁니다(10절). 이렇게 율법에 바탕한 거룩한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해주신 다음에야 비로서 우리는 무엇이 진짜 죄인지를 알고, 무엇이 허락되는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롬7:7).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통해서 죄를 죄로 안 이후에 따르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인정, 그리고 죄에 대한 반성과 교정이 따르는 회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간음한 여인은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서 죄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고, 예수님 앞에서 제대로 회심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 뒤로는 회개에 따르는 생명의 열매와 변화가 따라오게 됩니다.

3. 거룩하신 예수님의 정당한 정죄 아니면 불법이며, 무능하며 무대책입니다(10절).
여인을 잡아와서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예수님 보고 돌로 치라고 우겨대던 사람들이 다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자기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영혼을 정죄한 정당함과 거룩함이 자신들에게 없음을 예수님의 ‘죄 없는 사람이 돌로치라’는 말에서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타인에 대한 정죄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본인의 정죄입니다. 즉 죄책감입니다. 그것도 불법이며 무능력/무책임한 행위입니다. 이 정죄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자신과 타인을 파괴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죄에 대한 인식과 겸손과 회개, 교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결론 : 여러분은 자신을 용서(용납)하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정죄하고 있습니까? 그것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앞에서 겸손함으로 무릎꿇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 기회를 얻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용서로 살아나길 바랍니다.

0524-고난을 성숙의 기회로 (삼상 22:1~3)

아직 고난의 끝이 보이질 않네요. 많은 분들이 힘들어할텐데, 이런 때 신앙을 가진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런 고난의 시간이 우리에게 있어서 성숙의 기회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에게 고난은 그냥 불행이거나 나를 멸망시키고 무너뜨리는 징벌이 아니거든요. 믿는 자에게 고난은 오히려 연약한 우리의 옛 모습, 더러운 옛 습관을 버리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성숙의 시간입니다. 다윗이 경험한 것처럼요.

1. 억울한 다윗은 광야의 훈련을 통해서 궁핍을 이기는 법을 배웁니다(1절).
다윗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시기심과 자격지심에 찌들은 상관 사울와 때문에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유다광야 아둘람굴로 도망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그것은 그에게 겸손해져서 궁핍함 가운데에서도 지내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목동의 자리를 경험은 했지만, 이스라엘 전체에 등장한 이후로 다윗은 승승장구, 언제나 자신만만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군대장관이 약관의 나이로 되었고, 심지어 사울왕의 딸 미갈과 결혼하는 영광까지 누립니다. 문제는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다윗은 아직 자신의 권력과 능력 가운데 겸손해질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이스라엘의 진정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교만이 아니라 겸손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시간과 훈련이 필요했던 겁니다. 이미 마련되어 있는 권력 일부분을 받아 유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가운데 리더십을 만들어가고, 고난을 이겨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연습이 하나님 공동체의 리더가 되어야 하는 다윗에게는 필요했던 겁니다. 궁핍함에 처할 줄 아는 연습이 우리 모두에게는 필요합니다(빌4:12).

2. 다윗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해서 승리하는 법을 배웁니다(3절).
사울왕에게 쫓기던 다윗은 첫 번째 선택이 가드왕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왕에게 목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인간적으로 유대 땅을 떠나 다른 권력자에게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기 좋게 실패합니다. 그 다음 선택은 모압왕이었고 그것은 가능했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갓을 통해서 유대땅으로 돌아가라 하십니다.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고난의 자리,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길수 있는 자리로 돌아가라시는 겁니다. 이때 다윗은 사람의 생각이나 편안함이 아니라 불편하고 불안하고 위험이 도사리는 하나님의 계획인 유다광야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적을수록 더더욱 선택은 선명해지는 법입니다. 가장 어려울 때 누가 나의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될지가 분명해지는 법입니다. 유다광야와 같은 고난의 때가 하나님 의지하고 순종하는 훈련하기 적합한 장소입니다.

3. 다윗은 광야에서 여러종류의 사람들을 섬기고 리드하는 훈련을 합니다(2절).
광야로 도망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족들 뿐 아니라 여러종류의 사람들을 붙여 주십니다. 근데 하필이면 넉넉하고 좋은 교육을 받고, 든든한 사람들이 아니라 환난 당하고 상처 받고 뭔가 부족한 사람들을 붙여주시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사실 같이 지내기 힘듭니다. 상처들이 있어서 조그만 말에도 오해하고 화를 내고, 쉽게 거칠어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다윗은 그들에게 죽임당할뻔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보호하고 섬기면서 다윗은 모든 사람들을 다 리드하고 섬기는 훈련을 합니다. 비록 사백명 밖에 안되는 거칠은 무리지만, 이 무리를 인도하면서 나중에 유다지파, 더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를 이끌 수 있는 리더의 자질과 아량을 여기서 연습하게 됩니다. 다윗에게 광야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요람과 같은 장소였습니다.

결론 : 분명 고난은 힘듭니다. 그러나 영생이 있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들에게 그 고난은 성장의 기회입니다. 신앙도 성장하고, 우리 리더십도 성장하고, 또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평안하며 미래를 만들어 가는 성장의 시간입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의 어려움을 그런 성장의 기회로 삼아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