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꺼립니다. 분명히 우리에게 영혼이 있음을 모르는 그래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전혀 가지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무조건 꺼려지는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믿고 예수님의 은혜로 영생을 허락받고 천국 시민이 된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같이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1. 죽음을 꺼려할 대상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해야할 대상입니다(59절).
오늘 스데반 집사는 사도들에 의해 처음으로 임명받은 평신도 지도자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님을 유대인 앞에서 담대히 증언하다가 돌로 쳐서 죽게 됩니다. 의도치 않게 빠른 순교를 당하는 그이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시민이 된 사람들은 죽으면서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잘 준비해야할 하나의 관문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한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는 이치입니다(히9:27). 우리가 그 정해져 있는 마무리를 잘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꺼려하기 보다는, 그 죽음을 어떻게 잘 준비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헛된 짓 하지 않고 알차고 보람있는 인생, 아름다운 인생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인생에 대해서 배우려면 잔칫집보다는 초상집에 가야 합니다(전7:2). 기분에 취해서 아무 열매 없이, 마냥 즐거워하는 잔칫집보다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반성해 볼 수 있는 초상집이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주는데 훨씬 유익합니다(전7:4).

2.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보다 죽음을 통해 더 큰 메시지를 남깁니다(1절).
오늘 스데반 집사는 집사로 임명받은 후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못한채 순교를 당합니다. 그의 신실함과 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감안하면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스데반의 집사가 너무 아깝고 너무 아쉽지만, 영적으로 보면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의 죽음 때문에 엄청난 역사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던 예수님의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박해를 피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과 부활을 모든 영혼들에게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을 통해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사울은 이 스데반 집사 건 때문에 분노에 사로잡혀 모든 그리스도인을 잡아 박해하려고 혈안이 되어서 다메섹까지 찾아가다가 예수님을 만납니다. 스데반의 말을 통해서 회심을 한 것은 아니지만, 스데반의 말과 행동과 거룩함이 그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징검다리가 된 것입니다. 그 바울을 통해서 이방인들 즉 땅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졌고요. 스데반은 살아있을 때 적은 소리밖에는 못 냈지만, 죽으면서 세상에 울리는 아름다운 메시지를 전하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은 죽으면서 이 세상에 메시지를 남깁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진지하고 가장 확실한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아름다운 마무리는 복음으로 채워질 때 준비되어 갑니다(60절).
오늘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중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닮아있습니다(눅23:34). 스데반 집사는 말로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과 영혼이 모두 복음을 무장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지막이 그렇게 큰 울림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고요.

결론 :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하직합니다. 모두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길은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복음으로 무장되어 영적인 열매를 준비해 갈 때 가능합니다. 모두 이 축복된 마지막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카테고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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