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양심을 깨끗하게 (롬2:14-15)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시여기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경제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중에도 경제가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가게를 오픈하게 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소중한 것은 지혜입니다.

1. 지혜는 우리 삶에 가장 좋은 것들을 얻게 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23절).
돈이 있다고, 권세가 있다고 교만한 사람들을 자주 보는데,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짓입니다. 돈이나 권세있다고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람이 없는게 아니고, 자신이 을의 위치에 놓이지 않는게 아니거든요. 또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눈에 교만하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똑똑하고 일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쓰기에는 위험한 양날의 칼이거든요. 자신의 단체에 갈등을 불러오고 공동체 의식을 깨드리는 주범이요. 다스리는 자신에게도 해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입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어디 가서든지 교만하지 않습니다(잠11:2). 남을 배려합니다.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잠13:10). 미래에 올 수 있는 위험을 감지하고 미리 대비를 해서 평안한 길로 행합니다(23절). 관계도 편하고 마음의 평안도 있어서 스트레스도 적고 잠도 잘 자서(24절) 건강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잃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겸손함과 배려와 진실함으로 사람을 얻습니다. 그래서 돈과 권력을 금방 사라질 수 있어도 지혜는 지속적으로 더 얻어가는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지혜가 무엇보다 소중하고 생명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5,22절).

2. 참 지혜는 세상사는 요령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시111:10).
참 지혜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또 참 지혜는 자기계발서 등이 제시하는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어떤 행위들도 아닙니다. 참 지혜는 우리가 연약하고 죄악된 피조물이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니까, 교만할 수도 없고, 사람들을 지위나 능력이나 권력을 핑계로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니까, 진실하게 행동할 수 밖에 없고. 결국 그 사람의 삶이 지혜를 지키고 실천하며 생활화하는 지혜로운 삶이 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21절). 하나님을 경외하다보니까, 진짜 지혜로와지는 겁니다. 지혜는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실천이니까요. 세상에서 성공하는 요령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정한 지혜를 선택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는 성령의 은혜와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약1:5).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정한 지혜를 갇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갖가지 영적인 교훈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의 기준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법, 하나님의 진리를 실천하는 법도 구체적으로 배우고 익히게 됩니다. 성경 외에 하나님을 알 수 있거나 하나님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통로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진리는 내 죄악되고 세상에 물들어 있는 미약한 지성이나 영성으로 담을 수도, 품을 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바른 길로,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 : 여러분의 인생에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진정한 지혜를 가지기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그런 지혜 가까이 있습니다.

글쓴이 susueoul,

200705양심을 깨끗하게 (롬2:14-15)

살다보면 가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양심에 고장난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리도 뻔뻔하게 반응할 수 있는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심이 없는 걸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1. 양심은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안내자입니다(14절).
오늘 로마서 말씀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이 어떻게 율법 없이 율법이 요구하는 선을 이루어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서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이방인들에게 율법이 없어도, 그들 안에 있는 양심이 스스로에게 길잡이가 되어서 율법의 행위를 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겁니다. 이처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에게 양심이라는 안내자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선한 길, 즉 율법을 준수하는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 마음속에 마련해 놓으신 좋은 안내자입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드는 이 양심을 자신을 억누르는 억압자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불우하고 억압된 어린 시절에 폭력을 행하는 어른들의 강요하는 모습으로 인해 왜곡되고 비뚤어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양심을 지적한 것이지 제대로 작동하는 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우리를 억압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우리를 잘못된 길로 가지 말라고 경고해서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선한 인도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마치 요즘 자동차에서 충돌방지 자동시스템이 작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잘못된 길로 가면 경고하고, 올바른 길로 가면 응원하고 위로하는 작동 말입니다.

2. 이 양심은 우리를 고발하거나 변호하는데, 고장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15절).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이 양심이 기준이 되어서 살아가지만,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양심이 심판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 양심은 지금 현생이나 나중에 심판 때 우리가 잘못가거나 불의한 일을 할 때 우리를 고발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는 우리의 본심이나 의도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증언해주고 변호해 주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심이 제대로 살아 있을 때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우리의 죄된 습관과 환경 때문에 그 양심이 비뚤어지고 고장나기 일수입니다. 아까 말한 양심에 털이 난 사람들, 또는 사이코들이라 불리는 독특한 사람들은 이 양심이 변호만 하지 잘못된 길에 대한 경고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정당화 시키는 일만 하는 겁니다. 반면에 프로이드 경우 양심이 지나치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서 프로이드를 옥죄는 장본인이 됩니다. 이처럼 양심에 고장이 나면 우리를 끊임없이 고발만 합니다. 우리가 죽을 죄인인 것처럼 정죄하고 우리가 살 가치가 없거나 너무 죄인이어서 제대로 얼굴도 들지 못할 사람으로 고소 고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모두 양심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겁니다.

3. 이땅에서 고장난 양심은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질 때 고쳐져 갑니다(딤전1:5).
고장난 양심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마치 우리를 고치는 백혈구가 고장나면 우리 몸과 건강한 세포를 공격해서 백혈병이 되는 것처럼, 지나치게 예민한 양심은 우리를 숨도 쉬지 못하게 하고, 화인 맞은 양심은 잘못을 범하고도 미안해하지도 않고 자신의 변명만 늘어놓게 됩니다. 그런 고장난 양심은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만나야 합니다. 가장 진리이시고 가장 순수하신 우리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면 무엇이 잘못된 것이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구별하게 됩니다. 고장난 양심도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으면서 깨끗하게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그 작업은 죽는 날까지 지속되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 보혈을 거친 사람이어야 양심의 부작용 없이 올바른 인도함만 받으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결론 : 여러분의 양심은 잘 있습니까? 혹시 너무 자기 변호만 하지 않는지? 혹시 너무 고소고발해서 숨쉬지 못하게 하는지? 보혈로 온전해지는 여러분의 양심이 되길 축복합니다.

글쓴이 susueoul,

0628일상의 소중함 (전5:17-19)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의 일상들은 다 방해받고 있습니다. 저도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우리 교회의 자랑 중에 하나인 맛있는 점심을 함께 나누고, 소소한 잡담도 하고, 오후에 함께 예배하던 것이 너무 그리워집니다. 이런 때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바로 일상의 소소한 소중함입니다. 같이 밥 먹는 것, 같이 운동하는 것, 같이 예배하는 것 같은 것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묵상해 보길 원합니다.

1. 먹고 마시고 즐기는 모든 소소한 즐거움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18절).
지금과 같이 답답하고 힘든 시기를 지날 때 발견하는 것이 일상의 소중함과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솔로몬도 먹고 마시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막상 누리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를 사랑하셔서 위로를 위해 그 모든 것을 주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데 우리에게 모든 작은 즐거움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생명과 삶의 터전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셨을 뿐 아니라 소소하게 먹는 즐거움, 작은 기쁨, 일한 보람과 그 보상 등 삶의 모든 것들이 다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선물인지 평소에는 모르는데, 지금과 같은 때에는 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게 영생과 영혼의 평안까지 주시기 않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먹고 마시고 예배하고 같이 모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일상의 소중함은 그것이 선물임을 알고 찾아 감사하면 누리게 됩니다(19절).
평소에 우리가 이 일상의 소중함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왜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그건 우리가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또 17절에 나오는 근심, 질병 등 우리가 견디기 힘든 일에만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손 안에 있는 즐거움은 보지 않고, 밖에 있는 닿기 힘든 즐거움이나 만족만을 찾아 헤맸기 때문에 내 손안에 주어진 선물이 귀한 일상을 깨닫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일상을 깨닫고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소소한 선물들을 발견하려는 눈이 필요합니다. 나를 괴롭히는 코로나나 재정적인 압박이나 망가진 건강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내게 허락된 것들, 먹을 수 있는 즐거움, 잘 수 있는 편안함, 내게 주신 소중한 사람들,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들을 발견해 내야 합니다. 어둠이 깊어지면 앞이 보이지 않듯이, 자꾸 부정적인 마음과 현실이 커지면 내게 있는 것들은 잘 보이지 않거든요.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도 최소한 우리에게는 영생이 있고, 영혼의 은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선물들을 발견하는 눈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신 것을 감사하고 누리기 시작하면 되는 겁니다.

3. 동시에 노력할 것은 다시는 이 일상들이 빼앗기지 않도록 싸우는 것입니다(17절).
코로나 사태로 분명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일상이 사람들의 탐욕과 실수로 이렇게 완전히 망가지기 쉽다는 겁니다. 사실 많은 근심과 걱정과 분노가 다 우리의 욕심과 실수와 어리석음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리고 일상의 소중함을 지키기를 원한다면, 다시는 그런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사회가 그렇게 악해지지 않도록 투표를 하든지, 여론형성에 참여 하든지, 최소한 내 눈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들을 바라보고 놓치지 않고 누리릴 뿐 아니라 지키려 작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허탄한 것들에, 부정적인 현실 때문에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 일상의 소중함은 잃어봐야 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신 선물을 잘 바라보시고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다못해 우리에게는 영생과 영혼의 축복이 있습니다.

글쓴이 susueoul,

0621기다려 주시는 예수님(마26:40-43)

목회에서 제자훈련하면서 영혼을 돌보는 것을 목양이라고도 하고 양육이라고도 합니다. 아이를 기를 때 쓰는 말이죠. 양육이라는 말이 목회의 본질, 핵심에 대해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 없이 부어주고 기다려 주고.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고난의 때를 함께 이겨나가길 기다려 주십니다(40절).
예수님께서는 지금 십자가 고난을 바로 눈앞에 두고 계십니다. 이 고난은 예수님 당신에게 가장 힘든 것이지만, 또한 제자들에게도 힘든 역경의 시기, 고난의 시기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잡혀가는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모두다 이 시험의 때, 고난의 때에 다 넘어집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함께 깨어 기도하자도, 함께 이겨나가자고 제자들을 격려하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혼자 싸우지 말라고. 지금 우리 삶이 그렇고 이 코로나 사태가 그렇습니다. 혼자는 절대 못 이깁니다. 이 고난의 때는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처럼 영적이로 깨어 싸워야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 어두운 터널을 잘 이겨내시길 예수님께서는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2. 예수님께서는 훈련되지 못하는 제자들을 기다려 주십니다(41절).
예수님께서는 삼년 내내 12제자를 중심으로 함께 거하시면서 함께 전도하시고 함께 치유사역 하시면서 가르치시고 훈련시켜 오셨습니다. 이제는 훈련은 마치고 본격적으로 어둠과 싸워 이겨나가야할 사역의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아직도 이 중요한 시기에 한시간 깨어 기도할 정도로 훈련되지 못합니다. 덜 무장되어 있고, 영적으로도 덜 깨어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거나 떠나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기다리십니다. 떠나간 아들 돌아오길 기다리는 탕자의 아버지처럼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당신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교회의 기둥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역자들로 성장해 가길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가룟유다 외 모든 제자들이 돌아와 사도들과 교회의 기둥들이 되는 걸로 응답받고요. 예수님은 베풀고 기다리는 양육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동일한 기다림을 하고 계십니다. 언제 성장하려나, 언제 영적으로 무장되려나, 언제 제대로 말하고 제대로 행동하려나 우리가 영적으로 훈련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3.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를 기다려 주십니다(4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단순히 예수님의 팔로워, 추종자들만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무 훈련도, 교육도 안된 제자들을 불러서 한없이 사랑을 부어주시고, 감당치 못할 놀라운 가르침과 진리의 말씀으로 먹여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거룩한 통로와 사역자 되는 것이기에. 그것만이 그들의 존재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는 길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한 마음 한 뜻을 품기까지 되기를 기다려 주시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하여 주시는 것도 그것과 같습니다. 단순히 복 받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떠나가는 자들이 아니라, 복 받고서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의 마음과 비전을 함께 품기를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결론 :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목적 없이 헤매는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려 주시는 위대한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내가 이 고난의 때를 함께 이겨나가길 옆에서 기다려 주시는 분, 아직도 기도도 안하고 말씀도 안읽는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여 제대로 싸워나가길 기다리시는 분, 거룩한 목적과 삶의 의미를 함께 하기를 기다리는 분, 그분 예수님께서 기다려 주고 계십니다.

0614 보람 가득한 인생(막1:29-31)

몇 달이 지나도 코로나 사태가 잠잠해지지 않으니까, 모든 분들의 삶이 위축되고 암울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움추려 살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인생저무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생길 것같구요. 한평생 살면서 뭔가 가치 있는 일, 뭔가 보람된 일은 남기고 가야할텐데 말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런 비관적인 생각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장모의 보람 가득찬 인생말입니다.

1. 우리의 현실은 무능력, 무의미, 무가치한 상황입니다(30절).
귀한 그리스도이시고 위대한 스승이시며 사위의 주님되시는 예수님께서 집에 방문하셨는데도, 베드로의 장모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열병에 누워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이렇게 무능력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이도 먹어 이젠 인생에 특별한 의미나 가치 있는 일들이 일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저 열병에 시달리다 인생 저물수도 있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마치 코로나 사태에 잡혀 있는 우리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비즈니스도 할 수 없고, 심방도 할 수 없고, 뭔가 하려고 하면 감염사태가 무섭고, 또 사회적 거리두기 수칙 지켜야 하고. 뭔가 제대로 된 일 할 수가 없는 옴싹달싹을 못하는 무능력의 우리와 유사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부재하시고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는 귀한 사역이 부재한 상태의 우리 모습입니다. 나름 보람을 찾으려 하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이 다 조심스러울 때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인생 자체는 이처럼 허무합니다.

2. 그런 허무한 무가치한 인생에 예수님께서 오시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29절).
열병에 누어서 끙끙 거리고 아무런 소망이 없던 베드로의 장모의 인생 가운데 빛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침 회당 옆에 있어서, 마침 베드로의 장모이기에 온 인류의 희망이시고 존경의 대상이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서 그녀에게는 희망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부탁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기는 겁니다. 치료의 희망도 생기는 겁니다. 우리 인생도 마차가지입니다. 나 혼자서는 내 인생에 별다른 의미나 가치를 두기가 어렵습니다.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오래 살면 뭐합니까? 내 인생이 특별한 의미나 가치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게 찾아오시면 나의 인생은 영광된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주의 창조자께서 내게 오시고, 내 인생에 빛과 생명을 선사하시는데, 내게 영광스러운 순간들을 선사하시는데 얼마나 귀한 기회입니까? 예수님 없이, 인생은 너무 가볍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직접 찾아와 주시고, 손을 잡아주시고, 무능력에 빠진 우리 영혼을 일으켜 주십니다.

3. 예수님을 영접한 인생은 가치 있으며 능력이 넘치는 보람있게 됩니다(31절).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께서 다가오셔서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니까, 모든 열병, 즉 무능력이 떠나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찾아오신 것만으로 가문의 영광인데, 직접 만져주셔서 그녀의 인생은 빛이 나게 됩니다. 거기다 그 터치로 인해 무능력이 해소되어서 예수님을 섬길 수 있는 능력과 의지, 기회가 생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그녀의 인생에 다시올 수 없는 소중한 기회이며 그 결과가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까지 포함됩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달라진 인생,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은 바로 이처럼 가치 있고 능력이 넘치며 보람이 가득한 인생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녀가 여전히 가난하고 늙고 힘이 없고 아무런 영향력이 없어도, 예수님의 방문과 치유의 선물 하나도 모든 것이 달라진 것처럼요.

결론 : 여러분의 인생은 가치가 있습니까? 보람이 있습니까? 나로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지만, 예수님과 함께라면 내 인생은 저절로 가치가 생기며, 능력이 넘치게 되며 보람이 가득차게 됩니다. 코로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런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우리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글쓴이 susueoul,